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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국제금융기구들의 정책에 대한 교회들의 응답

 

[편집자 주]이 문건은 제3차 세계사회포럼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의 세계화문제에 관한 교회들의 대응을 부분적으로 다룬 WCC의 문건을 번역한 것입니다.

 

- 계략과 유혹들 -

국제금융기구들(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s: IFIs)은 자신들의 사회적 이미지와 정당성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이들의 목적과 이행방침을 선전하며 옹호하는 출판물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는 국제금융기구들만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매료되는 부분은 단연 이들이 지배하는 돈의 흐름에 의한 유혹과 이들에게 투자된 권력일 것이다. 아래의 단락들은 세계의 경제와 정치영역에 있어서 국제금융기구들의 역할과 성격에 관한 수많은 토론과 논쟁의 자리에서 직면하게 될 유혹과 시험의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주류에 순응하기" - 새로운 "종교" 단념하기

이전 단락에서는 국제금융기구들에 의한 강조점과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경제이론의 개발에 기인한 것이다. 용어상의 몇 가지 변화양상은 분명 사회운동들과 여타 목소리에 의한 비판들에 대해 반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체제와 경제성장의 핵심역할에 초점을 맞춘 점은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서 추진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의 강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처방은 세계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영역과 심지어 세계 사회의 삶에 있어서도 문화의 다양성과 지역경제의 다른 조건들을 무시하면서 규칙과 규범이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규칙과 규범은 대기업과 금융의 요구 및 이들의 유익에 온전히 복무하며, 전반적으로 국가로부터 민간영역으로의 권력이양을 요구한다. 그리고 소위 "시장세력"과 경제영역의 주요 행위자로의 권력이양을 합법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민영화, 자유화, 규제철폐는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용어라 하겠다.

특히, 초국적 기업과 금융기구들은 민영화와 시장의 개방화 그리고 규제철폐를 통한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대량의 축출 및 인류의 생명과 자연의 희생을 정당화시키면서 냉혹한 경제의 규칙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신분과 역할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분석하면서 몇몇 신학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의 핵심은 "시장의 종교"라고 명명했다. 이들은 강력한 저항과 반발에 부닥쳤다. 이 "새로운 시장의 종교"를 비판하는 자는 누구든지 "비현실적"이며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접근이라고 맹렬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비판에 대한 적대적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저 이의 흐름을 따라가며 주류에 순응하려는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대안은 없다" - 시장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시장 이데올로기를 절대 옹호해주는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문구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자들의 교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바로 가난과 소외의 증폭 때문에 이미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을 보다 무력화시키는 이 사회의 지배적인 슬로건이라 하겠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일단 받아들여지고 나면, 국제금융기구들의 핵심사업과 국가적 예산 및 국제금융제도들과 관련된 구체적인 결정사항을 다룰 경우에 있어 윤리적인 문제와 가난한 자의 삶 따위는 더 이상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된다. 공식적인 경제의 삶에서 축출당한 자들의 상황은 공식적인 경제사회의 통계수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이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제공한 거시적 경제의 기본 틀 내에서 취해진 결의사항을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험에 의하면, 여러 NGO들과 교회들 역시 더 이상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국제금융기구들이 내놓은 처방책들의 형태와 내용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도전을 줄여나가면서 이러한 체제를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축출된 자들이 당한 결과들에 대해 둔감해지는 현상으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모델은 정의에 대한 성서적 개념 및 1966년도 유엔협약이 명시한 경제, 사회, 문화적 인권에 대한 성서적 관점에서부터 심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발전의 흐름에 거스를 것인가?" - 터널비전 극복하기

경제의 세계화로 인해 혜택을 받은 자들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시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문제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하며, 이들이 약속한 장밋빛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금융기구들에 의해 추진된 무역의 자유화와 개방된 금융의 흐름에 따른 계율에 복종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는 마치 터널비전에 매달려 있는 모습과도 같다. 즉 터널의 어두움 속에서 엔진을 가속화시켜 더욱더 빨리 도로를 달릴 수 있다면, 터널의 끝에 도착하여 겨우 햇빛을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발전이라는 신화는 세계2차대전 후, 해리 트루먼 미대통령이 제안한 개발개념의 핵심이었으며, 이후 각종의 개발을 위한 여러 10년 프로그램에 있어서 유엔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는 정부만을 매혹시킨 것이 아니라, 북반구의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료된 남반구 국가들의 지식계급층을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존 공동체들의 사회적인 기본 틀 자체를 희생시켜가면서 북반구 사회를 따라잡기 위한 전략들로 인해 직면한 사회적 경비와 심각한 장애요소들을 경시한 결과를 가져왔다. 성장 신드롬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유한 문화적 경제적 환경과 자연의 소중한 한계 등은 아주 무시되고, 사회적 분열과 환경적 파괴를 가져오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수출주도의 성장과 포괄적인 접근방식인, 소위 "통화침투의 효능"(trickle down effect)이라는 입증되지 않은 신념에 초점을 맞춤으로 정의의 역할 및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존엄을 위한 기본적인 필수조건으로서의 공정성과 지속가능한 공동체들의 모습은 잘못 판단되었던 것이다.

"보다 경쟁적이 되라" - 관계적 삶의 측면 존중하기

생산단위의 최저임금 체계는 국제무역의 경쟁분야에 있어서 성공을 위하여 결정적인 것이다. 경쟁이라는 말은 시장경제의 기능을 위한 필수요건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에 있어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경제적 활동과 관계로서 결정된다는 "인간의 경제지상주의"(homo economicus) 개념으로 일종의 당연법칙이며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으로서 격상되었다. 이러한 인류학적 모델은 분명 경제적 삶을 위한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연대와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배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공동체의 사람으로 보기 보다는 개별체로 간주하며, 근본적으로 인간을 협력적이기보다는 경쟁적으로 보며, 정신적 존재라기보다는 물질적 존재로 간주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여타 기독교공동체들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노동이 자본보다 우선이라는 우선권은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의 사회윤리에 있어서 자연과 공동체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반영해준다. 경쟁에 강력한 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이 최우선이라는 개념을 퇴색시키며 공동체에서 가치를 찾는 행위 자체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

"돈이 전부다" - 가난감소는 불충분한 목표

다국적 금융대출 기관들, 강력한 국가들, 그리고 대규모의 초국적기업들은 자신들을 선전하는데 있어서 결속된 언어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핵심으로 들어가면 "저성장주의"(pro-poor growth)로 광고된 경제성장의 목표가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가난 자체를 자본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면서 근본적으로 돈이 없는 상황으로 접근하고 있다. 세계은행과 IMF는 OECD의 가난감축 목표를 지지하고 있지만, 가난근절의 문제를 정의와 인권의 문제로 수용하는 것은 거부하는 입장이다.

강력한 다국적 대출기관들이 연대의 담론을 시작할 때마다, 교회들은 간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일정정도의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한다.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자들은 갑작스럽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염려를 표명하는데, 특히 가난한 자들이 억압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삶을 누리기 위해 투쟁하고 있을 경우, 이는 절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은, 삶 자체가 경제성장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경험이 보여주듯이 오직 권력자들에게만 유익이 될 수 없다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복음의 핵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윤리와 공평을 염려하고 있다!" - 경영상의 가치에 대한 비판

국제금융기구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윤리적 가치들에 관한 대화에 초대하면서 짐짓 변화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 자체는 분명 이들의 정책들이 빈부간의 격차해소 및 보다 공평성을 얻는 데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빈부간의 격차를 확대시키고 가나한 자의 수가 확대된 것을 외면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분열과 환경적 파괴현상에 기여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력한 경제모델과 개발 패러다임에 대한 분명한 실패현상에 직면하여, 공적인 담론들은 대다수에 의해 공유된 윤리적 가치 및 이의 혼합된 목표들로 집중하고 있다. 모두가 윤리와 공평 그리고 가난근절과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목표와 지속가능한 개발의 목표들에 있어서, 국제금융기구들에 의해 혼합된 가치들은 실질적인 의사결정 및 이들의 프로그램 이행 자체를 지배하는 운용상의 가치체계는 아니며, 이들 가치체계는 여전히 지배적인 거시 경제적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표와 운용상의 가치들 사이의 모순은 혁신과 더불어 강력한 정치적 의지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필요로 하는 변화 자체는 행정적, 법적, 기술적이거나 과학기술적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성스러움을 강조시키면서 생명에 치중한 가치체계의 방향 자체에 있어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대안적 접근은 처음부터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이의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현지 공동체들의 필요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며, 이들을 국가적, 지역적, 세계적 정책들의 기초로 사용함으로써 "통화침투"(trickle down) 의 접근법이 아닌 "증강정책"(building up)의 접근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은행은 몇 년 전 종합개발체제(Comprehensive Development Framework: CDF)를 도입했으며, 이 CDF에 기초한 가난해소전략문건들(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s: PRSPs)은 짐짓 관심이 있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진정한 참여를 위한 원칙을 부여하려고 한다. 하지만 PRSP-Watch와 옥스팸(Oxfam) 등의 독립단체들에 의한 평가를 보면, 이러한 절차들에 대한 참여적 성격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온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게임의 통치체제는 국제금융기구들의 직원들과 이들의 정책적인 지침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만인을 위한 최선을 바란다" - 윤리적 도전으로 민중과 대결시키기

국제금융기구들의 직원들 가운데는 물론 자신들의 신앙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와 그밖에 종교공동체들에 속한 회원들이 많이 있다. 이들 기구들에 속한 직원들 개개인의 도덕적 기준을 단순하게 실격자로 판정하는 것은 대단한 과오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책임지고 있는 활동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구심과 문제의식 그리고 기대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비판은 일차적으로 이들이 일하고 있는 기관들의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체제 자체에 가해져야 할 것이며, 지나치게 우세한 경제적 패러다임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져야하며, 국제금융과 세계무역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돼야할 것이다.

하지만 개별적인 문제점 또한 당사자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소재로서 가려져야 한다. 이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돼야한다: 모든 국가들이 원자재의 공급자로서 존재하도록 강요받고, 부유국가들의 부와 권세를 키워주도록 값싼 노동을 제공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과연 이들의 책임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체념하지 않고 과연 책임질 만한 사람이 있는가?

"잘못된 통치와 부패, 퇴보된 전통이 문제다" - 희생자 비난 거부하기

국제금융기구들은 계속하여 우세한 경제적 패러다임의 기본가설을 옹호하고 나선다. 민중과 비판적 NGO들에 의해 강조된 부정적 결과들로 인해 종종 이들의 프로그램과 프로젝트의 이행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국제금융기구들이 선호하는 전략은 좋은 통치의 필요성, 부패와의 전쟁, 공동체중심의 전통과 시장경쟁에서 요구하는 경쟁의식 사이의 대립을 지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시간의 문제이며, 보다 긍정적 결과를 얻기 위한 "거시경제지표"(sound macro-economic)의 적절한 이행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들을 충족시켜주는 파트너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북반구 사회에서 널리 수용된 적대감에서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남반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바로 희생자를 비난하고,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에 대한 분석을 빗겨가려는 시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최근에서야 접할 수 있었던 이전의 식민지세력의 자본에 대해 기록된 문헌을 보면, 국민을 책임지는 정부를 건설하고 독립과 민족중심의 개발을 이행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표적이 되고 파괴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공동체의 핵심적인 공적 채권들은 조직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과 공동체 지도자들을 뇌물로 매수하는데 심혈을 기울임으로 외국기업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데 철저히 이용됐었다. 따라서 왜곡된 시장에 대하여 논하는 대신, 고삐 풀린 시장 세력의 영향력 하에서 발생하는 왜곡된 사회현상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교회들과 함께 활동하고 싶다" - 권력의 브로커역할 거부하기

최근의 세계은행과 IMF의 주도적인 움직임은 시민사회에 대한 대변인 역할을 정당화시킴으로써 교회들의 활동에 참여하려는 자신들의 관심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바로 확산되는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이들이 이행하려는 정책들에 반대하며 거리에서 벌이는 대중의 저항시위로 인해 국제금융기구들과 WTO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신임도 추락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이세계의 다른 종교들을 대표하는 인류의 오랜 기억 속에서 경제의 세계화가 합법적인 기반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기도 하다.

국제금융기구들의 초청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할 것이며,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자문할 것이다: 국제금융기구들의 관심은 무엇인가? 왜 저들은 우리의 협력을 바라는가?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리가 책임져야할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에큐메니컬적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사안은 무엇인가? 과연 누구의 목소리를 강화시키며 주장해야 하는가? 과연 교회들과 NGO들 및 여타 기관들이 강력한 금융대출기관들을 위해 중역들과 의견을 타진하거나 거리낌 없이 말하는데 악영향을 미치도록 합법화된 민중의 대변인을 지지하고 나설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만남을 위한 적절한 강령이나 체계는 무엇일까?

국제금융기구들은 강력한 기관이이며 이들의 결정은 여러 국가들의 상황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교회지도자들과 교계관련 단체들의 대표들이 이들 기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사결정에 있어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유혹할 만한 일이다. 이는 이러한 선택에 흥미를 느끼도록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유혹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의 삶을 위하여서도 매우 중요한 정책들을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국제금융기구들의 직원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논의 자체가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합리적일 수 있을까? 어느 전 재무부장관은 결국 세계은행과 IMF에 의해 결의된 결정은 곧바로 미국 재무부의 입장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바 있다.

따라서 국제금융기구들의 실질적인 파워는 이들 기관들의 대다수 투표권을 쥐고 있는 G7국가들의 대표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발의 영적차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 - 영성에 대한 이해 명료화시키기

국제금융기구들은 점차 종교와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이사를 임명했다. 이러한 배경에 반대하여 교회의 대표들은 국제금융기관들의 회원들과 모임을 갖기에 앞서, 자신들의 고유한 영성에 대한 이해를 명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세계은행은 개발을 위한 삶의 영적 차원에 대한 중요성을 주장하며 영적지도자들과의 접촉 및 개발에 있어서 종교공동체들과 영성에의 접근 자체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여주는데, 실제로 세계은행은 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다.

영적지도자들이 국제금융기구들에 의해 자신들의 고유한 지반으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유쾌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의 오랜 전통은 권력자에 대하여 심지어 교회권력 조차 비판해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전통은 기관들이나 이데올로기와 체제들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영성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힘없는 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부여해왔다. 자유와 힘이 개별적 및 타자와의 연대의식 모두에 있어서 개발되어왔다.

기독교의 영성은 인간 삶의 모든 차원을 통합하고 있으며 이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역사적 조건들 및 이들의 가치체계들과 연결되어 있다. 영성의 관계적 측면을 강조하는 데는 다음과 같이 이의 4가지 차원이 강조돼야한다:

  하나님은 초월적 관계에 대한 사안이다.

  영성은 인간의 내면적 발전에 관한 문제이다.

  연대의식은 다른 인간과 인류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자연은 창조세계 일부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모든 차원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타자를 배제하고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서 발전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이는 바로 오로지 개인에 관해서만 말하는 영성이나 또는 개인은 영성을 위한 유일한 근거라고 믿는 영성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차원이 반드시 동등하게 존중돼야하며, 공동체의 가치 있는 삶이 지배적인 서구문명보다 소중하다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전통들의 다양한 사안들로 평가돼야한다.

다양한 교회적 전통들에서 기독교는 공동체의 삶에 대한 영성과 죽음의 세력과 맞서 악의 세력과 분투하는 영성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인간과 창조세계 및 영적인 삶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권력들과 맞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또는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의 연대성에 대한 기본 특성을 파괴하는 구조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반대하며 다루어져야한다.